1. 사건의 배경 – 왜 ‘형제복지원’이 생겼나?
1970년대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정부는 국제사회에 ‘잘 사는 나라’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도시 미관을 중시했고, 거리의 노숙인이나 고아, 장애인 등을 **‘부랑인’**으로 낙인찍어 단속했습니다.
- 1975년 내무부 훈령 410호는 부랑인들을 시설에 수용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는데, 이 제도가 악용되어 사실상 **‘사회적 약자 수용소’**가 탄생한 것입니다.
- 이 법적·제도적 허점 속에서, 부산의 박인근은 ‘형제육아원’을 기반으로 1975년 형제복지원을 세우고, 정부 지원을 받으며 대규모 수용 시설을 운영했습니다.
즉, 형제복지원은 단순한 사설 복지시설이 아니라, 국가와 권력의 묵인 아래 운영된 강제 수용소였습니다.
2. 형제복지원의 실상 – 강제 수용과 인권 침해
형제복지원의 수용 인원은 최대 3,146명, 아시아 최대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복지시설이 아니라, 사실상 **감옥보다도 가혹한 ‘인권 지옥’**이었습니다.
- 강제 연행 : 거리의 노숙인뿐 아니라, 버스를 기다리던 학생, 공장에서 퇴근하던 노동자, 심지어 집에서 자던 시민까지 ‘부랑인’으로 몰려 끌려갔습니다.
- 불법 감금 : 일단 들어가면 가족조차 만날 수 없었고, 탈출 시도 시 폭행과 고문을 당했습니다.
- 강제 노역 : 수용자들은 벽돌 공장, 건축 현장 등에서 무임금 노동을 강요당했고, 그 수익은 박인근 개인 재산으로 축적되었습니다.
- 폭력과 사망 :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51명, 그러나 생존자들은 실제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고 증언합니다.
- 성폭력 : 미성년 소녀와 여성 수용자들은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되었습니다.
- 종교 강제 : 입소자들에게 성경 암송과 예배 참석을 강요하며 종교를 통제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군대식 위계 구조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수천 명이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3. 사건의 폭로와 수사 과정
1987년, 당시 울산지청의 김용원 검사가 철저한 수사를 벌이며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는 형제복지원의 불법 행위와 사망 사건을 조사하며, 박인근과 간부들을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 1심 : 특수감금 무죄, 횡령만 유죄 (징역 2년 6개월)
- 항소심 : 형량 4년으로 상향
- 대법원 : “부랑인 수용은 직무상 정당 행위”라며 특수감금을 다시 무죄로 판결 → 결국 횡령죄만 확정
즉, 국가가 주도한 불법 감금은 법원에서조차 정당화된 것입니다.
4. 사건의 은폐와 사회적 침묵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시 6월 민주항쟁과 겹쳐 큰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국가와 언론은 이 사건을 축소·은폐했고, 박인근은 이후에도 사회복지재단을 운영하며 재산을 늘렸습니다.
부산 형제복지원 터는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었고, 수천 명의 희생은 잊혀져 갔습니다.
5. 피해자들의 증언과 재조명
시간이 흐른 뒤, 생존자 한종선 씨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면서 사건은 다시 조명되었습니다.
-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책 《살아남은 아이》를 출간했고, 국회 앞 1인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 언론과 시민사회가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형제복지원은 대한민국 최악의 인권 유린 사건으로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 2018년 국회는 특별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진상 규명과 국가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6. 역사적 의미와 교훈
형제복지원 사건은 단순히 한 사설 복지시설의 비리가 아닙니다.
- 국가 폭력의 민낯 : 정부와 경찰이 ‘사회 정화’ 명목으로 불법을 묵인했고, 법원마저 이를 합법으로 판결했습니다.
- 인권의 후진성 :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며, 사회적 약자는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 기억과 정의의 중요성 : 피해자들이 직접 증언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침묵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건은 “가난한 이들에게 국가는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7. 결론 – 잊지 말아야 할 현대사의 교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집단 인권 유린입니다.
- 국가가 만든 제도와 권력이 어떻게 약자를 억압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며,
- 피해자들의 긴 투쟁이 없었다면 여전히 은폐되었을 사건입니다.
- 앞으로는 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 피해자 명예 회복, 국가 배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약 정리
기간 | 1975~1987년 |
운영자 | 박인근 |
수용 인원 | 최대 3,146명 |
사망자 | 최소 551명 (실제는 더 많을 가능성) |
피해 유형 | 불법 감금, 강제 노역, 성폭력, 폭행, 사망 |
재판 결과 | 특수감금 무죄, 횡령만 유죄 (2년 6개월) |
의미 | 국가와 권력에 의한 집단 인권 유린, 정의 회복 과제 남음 |